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어떤 가난

김동률의 시

by 그리운섬 2008. 7. 31. 18:31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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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  어떤 가난 나는 참 행복하다. 공직자 재산 공개가 실시되더라도 아무 걱정이 없다. 누가 나에게 청탁 넣으며
    안주머니 깊숙이 봉투를 찔러 주지도 않고, 아내 이름으로나 자식 명의로 감춰 둔 부동산은 물론이거니와, 조상님들이 물려 준 산자락 한 모퉁이도 없으며, 호화 별장은
    말할 것도 없고, 송곳 꽂을 땅뙈기는커녕 내 이름 석 자로 등기된 변변한 집 한 칸도
    갖지 않았다. 그러므로 나는 재산 공개를 할 필요가 없다. 이런 나를 두고 아내는 푼수
    라고 칭찬한다. 나는 참 행복하다. 금융실명제가 아무리 실시되더라도 조금도 걱정이 안 된다. 우리나라 대통령이
    ‘가진 자’는 고통스럽고, ‘없는 자’가 불편하지 않는 나라를 만드시는 까닭에, 사채
    시장에서 돈을 빌어다 부도 막을 회사를 갖지않았고, 담보 내걸고 문턱 높은 은행
    서 대출을 구걸하지 않아도 좋으며, 사원 명의로 비자금을 수 억 원 맡긴 탓에 법
    정 싸움에 골치 앓을 필요가 없고, 자금 출처를 조사당할 일도 없으며, 가명 예금을
    실명으로 전환하러 복잡한 은행에 가서 눈치 안 봐도 된다. 이런 나를 두고 사람
    들은 얼간이라고 칭찬한다. 나는 참 행복하다. 올해 같은 기상 이변의 흉년에도 나는 아무 걱정이 없다.‘신토불이(身土不二)’
    를 부르짖는 훌륭한 분이 계시대서, 내가 지독한 농약 냄새를 맡으며 땀 흘릴 필요가 없고, 저온 현상으로 수확이 준다고 하늘 쳐다보며 한숨지을 일이 없으며,
    농약 대금 비료 대금으로 밀린 농협 빚은 더더욱 없으니 좋고, 우루과이 라운드다 뭐
    다 해서 쌀 수입 문제로 근심할 일이 없으며, 중국산 수입 참깨나 수입 감자 때문
    에 값싼 농산물이 시장에 풍성해 내 작은 돈으로도 우리 집 식탁은 넉넉할 수 있
    다. 이런 나를 두고 가족들은 바보라고 칭찬한다. 나는 가난하다. 고로 행복하다.


 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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